“눈뜬 자와 눈먼 자들” (요한복음 9:1~12)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같이 하자’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일도 함께 하기 힘든데, 더더군다나 하나님의 일은 함께하기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은 ‘우리가 함께 일을 하자’고 하십니다.
‘우리는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아무도 일할 수 없는 밤이 곧 온다’(요9:4). 낮에만 일하고, 밤에는 일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인가? 이 말씀은 물리적인 낮과 어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 세상에 빛으로 보내셨으므로 내가 하는 일이 곧 빛의 일이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심으로, 예수님이 제자들을 통해서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은 제자들과 힌놈(기드론) 골짜기로 갔던 것 같습니다. 그 골짜기로 올라가다가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만났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2절, [표준새번역]). 그들은 유대인의 관점으로 이러한 질문을 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20장의 말씀에, ‘너희가 죄를 지으면 그 죄 값이 삼 사대까지 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롯한 많은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시각이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의 시각은 제자들의 시각과 다릅니다.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그에게서 드러나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생각도 다르고, 방향도 다른데, ‘우리가 일을 하자’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태어날 때부터 눈먼 사람은 그의 죄값을 치루고 있는 것이다’고 정죄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향해 돌을 든 것(요8장)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유대인들의 통념으로는 당연한 일이었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어떤 문제에 대하여 예수님의 시각과 우리의 시각이 일치합니까? 예수님의 관점과 우리 관점이 일치합니까? 같지 않다면, 동역하기 어렵습니다. 동행은 더더욱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나와 너희들이 함께 ’우리가‘ 되어서, 나를 보내신 하나님의 일을 하자’고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유대인들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나를 보내셨다’고 줄기차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눈먼 사람에게 진흙을 바르는 것에 이 눈먼 사람이 동의했을까요? 그는 시각장애인이면서 걸인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온갖 멸시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실로암 연못으로 가서 씻었습니다. 시각장애인에게는 1km도 먼 거리일 터인데, 그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갔습니다. ‘실로암을 번역하면 보냄을 받은 자라’는 요한복음에 76번 언급됩니다. 이 실로암은 예수님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으신 예수님 안에 빠져서 살면 씻음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눈뜨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눈과 귀가 열리기를 원하십니다. 믿음은 눈과 귀가 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모든 성도들이 동역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