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소식

목사님설교요약

내가 일어나(3/26)

손창숙 0 1,451

내가 일어나 (누가복음 15:18)

 

인생의 절망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주저앉아 있을 때가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인생의 절망의 자리에 있는 탕자를 보게 됩니다. 이 둘째 아들의 행위는 현재의 중근동 사회에서도 용납 받지 못할 폐륜적인 행동 입니다. 부모가 죽어 유산을 남기기도 전에 자기의 몫을 요구하는 아들의 존재는 그 어디에서도 환영 받지 못할 행동입니다.

 

둘째 아들의 행동의 결과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잠시 동안 자기의 소유를 가지고 일락의 생활을 할 때는 영원한 기쁨 가운데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환락의 삶의 종국은 유대인들이 그토록 천히 여겼던 돼지우리에서 먹고 자는 삶으로 추락한 것이었습니다. 그 삶의 자리는 내일에 대한 희망과 기대가 전무한 자리였습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품을 떠난다는 것을 쉽게 여기고 그 결과에 대해서 생각 못하지만, 그 결과는 실제적이고 삶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아버지의 품안입니까? 아니면 아버지 품 밖의 소망 없는 자리입니까? 성경에는 네크로스’(nekros)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명사로 쓰일 때는 육체가 죽었다는 의미로 사용되지만 형용사로 사용될 때는 살았으나 죽은 것을 말하는 관계의 죽음을 말합니다. 우리는 성도의 이름은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의 관계에서 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계는 직분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확증해주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네크로스 관계적 단절에 있다면 우리는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아나스타시스’(anastasis)부활다시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삶의 절망의 자리에서 다시 스스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네크로스에서 아나스타시스로 다시 일어서고, 아버지의 품으로 가야겠습니다.

 

본문에서 탕자는 자신의 지난날의 과오로 낙망했지만, ‘다시 일어서겠다고 다짐합니다. 내가 삶의 끝 나락의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그분의 품에 들어간다는 것이 바로 탕자의 모습입니다. 무엇이 낙심의 자리에서 문화적, 사회적 인식의 장벽을 넘어서 아버지께로 스스로 돌아가게 했습니까?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이었습니다. 늘 집나간 아들을 기다리던 아버지의 사랑, 아들이 돌아왔을 때 새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워주고, 새신을 신기고, 잔치를 배설했던 아버지의 사랑이었습니다. 베드로 역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지만 예수님 앞에 다시설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그를 여전히 사랑하시고 기다리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사랑으로 기다리는 아버지는 다시 일어나돌아온 아들의 신분도, 관계도 모두 회복시켜 줍니다. 21일 동안의 세이레 특별새벽기도는 우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입니다. 아들이 일어나 돌아가는 결단이 없었다면, 아버지가 사랑으로 준비한 많은 선물은 누구의 것이 되었겠습니까? 우리가 삶의 자리를 딛고 새벽에 일어나 하나님의 잔치에 동참한다면 아버지께서 준비하신 영원한 부활의 은혜가 우리의 것이 될 줄로 믿습니다. 지금 바로 일어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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